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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

by 너싱홈 2017. 10. 7.

출생 1766. 2. 14/17, 잉글랜드 서리 도킹 근처 루커리
사망 1834. 12. 23, 서머싯 배스 근처 세인트캐서린
국적 영국 

맬서스는 저서 <인구론>에서 인구증가는 언제나 식량공급을 추월하기에 인류의 운명은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는 이론을 펼쳤다.

가난을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보는 경제적 비관주의자였고, 1798년 익명으로 <인구론>의 초판을 출간해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저서에서 인구는 억제하지 않으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나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만 증가하므로, 인구는 생존의 한계까지 늘어난 다음 기근·전쟁·질병으로 팽창을 멈추게 되며, 피임과 결혼 연기 등의 악덕과 빈곤만이 지나친 인구증가를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인구이론은 현대 경제학체계로 흡수되어 경제적인 낙관주의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으며, 최저생계비를 임금책정 기준으로 삼는 임금이론을 정당화시켰고, 전통적인 자선과 구빈법이 축소되도록 했다.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

경제학자. 전 대학교수

인구증가는 언제나 식량공급을 앞지르는 경향이 있으며, 엄격하게 산아제한을 하지 않으면 인류의 운명은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는 이론으로 유명하다.

맬서스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철학자이자 회의주의자인 데이비드 흄의 개인적인 친구였으며 장 자크 루소의 열렬한 제자이기도 했다. 그는 루소의 〈에밀 Emile〉을 읽고 아들이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갖도록 교육시켰던 것 같다. 맬서스는 주로 집에서 교육을 받다가 1784년 케임브리지대학교 지저스 칼리지에 들어갔다. 1788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여러 과목을 폭넓게 공부하면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과목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1791년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793년 지저스 칼리지의 명예 펠로가 되었고 1797년 목사로 부임했다.

1796년 〈위기 Crisis〉(미출간)라는 소논문을 썼는데, 그 내용은 구빈원을 세우기 위해 새로이 제출된 구빈법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2년 뒤 발표한 〈인구론 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 as it affects the Future Improvement of Society, with Remarks on the Speculations of Mr. Godwin, M. Condorcet, and other Writers〉의 견해와는 상당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맬서스의 이론에는 대체로 아버지의 견해와 프랑스 혁명 및 그 지지자들의 사상이 호의적으로 나타나 있다.

예를 들어 급진적인 영국의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의 저서 〈정치적 정의 Political Justice〉(1793)에 나타난 인류의 완전함과 같은 견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를 이론적인 관점에서 본 고드윈(또는 루소)과 달리 맬서스는 근본적으로 경험주의자였기 때문에 자기 시대의 혹독한 현실을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현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오늘날 사회학적이라고 평가되는 영국 경제학의 전통을 통해 이루어졌다.

맬서스는 1798년 익명으로 〈인구론〉의 초판을 출간해서 널리 주목을 받았다.

그의 주장은 간략하고 거칠지만 강렬했다. 인간이 사회적 행복을 끝없이 바라는 것은 인구가 생산증가를 언제나 앞지르는 것을 감안할 때 헛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인구는 억제하지 않으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나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만 증가하므로, 언제나 인구는 생존의 한계까지 늘어난 다음 기근·전쟁·질병으로 팽창을 멈추게 된다. '악덕'(맬서스에 따르면 피임도 포함)·'빈곤'·'극기'를 통해서만 이같은 지나친 인구증가를 억제할 수 있다.

맬서스는 가난을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보는 경제적 비관주의자였다.

〈인구론〉의 초판에 담긴 주장은 근본적으로 관념적·분석적이었다. 유럽을 여행한 뒤 여러 가지 사실자료와 해설을 덧붙여 1803년 2판을 출간했다. 그러나 1826년 가장 부피가 큰 6판이 나올 때까지 그는 한번도 자기 이론의 전제를 적절하게 설명하거나 논리의 타당성을 검토한 적이 없었다(경제이론). 그리고 당시는 유럽의 어디서나 통계학자의 궤변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는데도, 사실자료와 통계자료를 비판적·통계학적으로 엄격하게 다룬 적이 없었다.

미국의 인류학자 킹슬리 데이비스는 맬서스의 이론이 폭넓은 경험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나 경험주의의 측면에서 가장 약점이 많은 반면, 엄격하고 세련된 이론체계로서 가장 장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 지적에는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

좋든 나쁘든 간에 맬서스주의적인 인구이론은 현대 경제학체계로 흡수되어 경제적인 낙관주의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으며, 최저생계비를 임금책정 기준으로 삼는 임금이론을 정당화하는 데 이바지했고 전통적인 자선 형태가 사라지도록 했다.

맬서스주의적인 인구이론이 사회정책에 직접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다산(多産) 자체가 국가의 부를 증가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에 구빈법은 구호를 통해 대가족의 유지를 장려했을 것이다. 맬서스에 따르면, 만약 "구빈법이 없었다면 극심한 가난을 보여주는 예들은 좀더 많아졌을지 모르지만 민중들 사이의 행복의 총합은 더 커졌을 것"이다.

구빈법은 노동력 이동을 제한하고 다산을 장려했기 때문에 당연히 없어져야 했다. 가장 불행한 사람들을 위하여 구빈원을 세운다면 정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빈원은 '안락한 피난처'가 아니라 음식을 얻어먹기도 아주 어렵고, 극도로 가난해야만 겨우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장소여야 했다.

맬서스는 1804년 헤리엇 에커설과 결혼했으며 1805년 하트퍼드셔 헤일리버리의 동인도회사가 운영하는 대학의 역사학과 정치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그같은 교수직이 개설된 것은 영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건강을 이유로 1817년 아일랜드와 1825년 유럽 대륙을 여행한 것을 제외하면 헤일리버리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으며, 1811년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를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맬서스는 경제학에 대한 소논문과 책자를 계속 출간하면서 리카도보다는 덜 엄격하게 가격결정 문제에 접근하여 제도적으로 결정되는 '유효수요'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유효수요란 맬서스가 만들어낸 용어였다. 1820년에 〈경제학 원리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Considered with a View to Their Practical Application〉를 통해 경제적 빈곤에 대한 임시방편으로 유효수요와 번영을 가져올 공공사업과 개인의 사치성 투자를 제안하기까지 했다. 나아가 절약이 지고의 미덕이라는 견해를 비판하면서 오히려 "저축의 원리를 지나치게 밀고 나가면 생산의 동기를 없애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를 극대화하기 위해 국가는 '생산능력과 소비의지' 사이에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공급과잉 문제, 곧 불황과 경기침체에 관심을 둔 맬서스는 1930년대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경제학적인 발견을 예고했다고 할 수 있다. 1819년 왕립협회 회원으로 뽑혔으며, 1821년 정치경제학회 회원이 되었는데 정치경제학회 회원으로는 리카도와 제임스 밀도 있었다. 1824년 왕립문인협회의 10명의 준회원에 끼게 되었다. 1834년 런던 통계학회를 공동 설립했으며, 1833년 프랑스 윤리학·정치학 학사원과 베를린 왕립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말년에도 여러 편의 글을 썼으나 실질적으로 〈인구론〉이나 〈경제학 원리〉의 내용에 덧붙일 만한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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