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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정보/사회복지이론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

by 너싱홈 2017. 1. 30.

출생일 1849. 9. 26(구력 9. 14), 러시아 랴잔
사망일 1936. 2. 27,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 러시아

요약 파블로프는 조건반사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하며 인간의 행동을 신경계와 관련시킨 선구적 연구를 수행한 인물이다. 마취되지 않은 정상적인 동물에서 분비액의 분비가 불규칙하게 일어나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조건반사에 대한 법칙을 공식화했다. 정신현상과 높은 수준의 신경활동을 객관적,생리적으로 측정하기 위해 동물의 물리적 혹은 심리적인 활동을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데 침샘분비를 이용했다. 또한 이자액과 위액이 신경의 기능으로 분비된다는 사실을 입증하여 신경 지배 연구에 있어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공산주의자 및 소련 정부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표명한 일화들은 소비에트 연방뿐만 아니라 과학사에 있어서도 특별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1904년 소화액 분비에 관한 연구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개요

    조건반사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파블로프는 굶주린 개가 전에 먹이광경과 연관시켰던 종소리에 반응하여 침을 분비하도록 훈련시켰다. 그는 조건형성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인간의 행동을 신경계와 관련시킨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하면서 이와 비슷한 개념적 접근을 전개시켜나갔다(→ 인간행동). 1904년 소화액 분비에 관한 연구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생리학, 고전적 조건형성).

    생애

    시골 목사의 맏아들이자 교회지기의 손자였던 파블로프는 중앙 러시아의 고향(랴잔)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는 교회학교와 신학교에 입학하여 헌신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신학 선생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1870년 파블로프는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로 가서 화학과 생리학을 공부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임피리얼 의학 아카데미에서 의사자격을 취득(1879 졸업, 1883 논문 완성)한 후, 1884~86년 라이프치히의 심장혈관 생리학자 C.루트비히와 브레슬라우의 심장생리학자 R.하이덴하인의 지도 아래 독일에서 연구했다.

    루트비히와 공동으로 연구하면서 파블로프는 순환계에 대해 독자적인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1888~9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봇킨 실험연구소에서 심장의 생리와 혈압조절에 관해 연구했다(→ 심장 카테터법). 그는 능숙한 외과의사가 되어 마취를 하지 않고도 고통 없이 개의 대퇴부 동맥에 카테터(catheter)를 주입하고 다양한 약리적·정서적인 자극이 혈압에 미치는 영향을 기록할 수 있었다.

    미세한 심장 신경을 조심 스럽게 절개함으로써 그는 심장신경얼기에서 나가는 신경들이 심장박동의 강도를 조절한다는 사실을 밝혔으며, 절단된 경수신경의 말단을 자극함으로써 좌우 미주신경(迷走神經)이 심장에 미치는 영향도 규명했다.

    파블로프는 1881년 작가 F.도스토예프스키의 친구인 지적이고 매력적인 한 학생과 결혼했으나 가난 때문에 초기에는 서로 떨어져 살아야 했다. 그는 자신이 얻은 성공의 많은 부분을 가정적·종교적·문학적이고 자신의 편안과 연구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부인의 업적으로 돌렸다.

    1890년 그는 임피리얼 의학 아카데미의 생리학 교수가 되어 1924년 사임할 때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새로 설립된 실험의학연구소에서 그는 외과수술 후 조리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데 필요한 설비에 큰 주의를 기울여, 동물들을 대상으로 외과적인 실험을 시작했다. 특히 1890~1900년, 그리고 대략 1930년까지 파블로프는 소화의 분비 활성에 대해 연구했다. 하이덴하인과 공동으로 연구하는 동안 그는 작은 위(miniature stomach)를 표본화시키는 기술을 고안하여 미주신경이 분포된 채로 위를 분리했다.

    파블로프는 외과적인 실험방법으로 정상적인 동물의 위장액 분비를 연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는 저서 〈소화샘 연구에 대한 강의 Lectures on the Work of the Digestive Glands〉(1897)에서 정점에 달했다.

    조건반사의 법칙

    마취되지 않은 정상적인 동물에서 분비액의 분비가 불규칙하게 일어나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1898~1930년 무렵 그는 조건반사에 대한 법칙을 공식화할 수 있었다.

    정신현상과 높은 수준의 신경활동을 객관적·생리적으로 측정하기 위해 그는 동물의 물리적인(또는 심리적인) 활동을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데 침샘분비를 이용했고, 조건반사와 척수반사 사이의 유사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생리학자 찰스 셰링턴 경은 척수반사는 많은 신경의 흥분과 억제, 유도(즉 그 전의 흥분에 의해 야기된 억제의 증가 또는 감소), 그리고 많은 신경중추로의 신경충격의 방출 등과 같은 복잡한 성분을 포함하는 신경계의 통합작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파블로프는 이러한 성분에 피질과 피질하의 영향, 뇌의 모자이크 작용, 억제의 확산에 미치는 수면효과, 그리고 근본적으로 피질 흥분과 억제 사이의 층돌 또는 갈등에 의한 뉴런 장애의 기원 등을 첨가했다.

    1930년초 파블로프는 자신의 법칙들을 인간의 정신 이상을 설명하는 데 적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정신의학). 극도의 흥분을 유발한 유해 자극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그는 정신이상자의 특징인 과도한 억제현상을, 외부세계를 차단하는 방어 메커니즘의 일종으로 가정했다.

    이러한 생각은 조용하고 무자극적인 환경에서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파블로프는 단어를 수반하는 긴 연쇄적 조건반사에 기초하여 인간의 언어 기능에 있어 중요한 원리를 발표했다. 그는 언어 기능이 단어 이외에 인간보다 하등한 동물에서는 불가능한 개념의 정교화도 수반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

    공산주의자 및 소련 정부와 파블로프 사이의 관계는 소비에트 연방뿐만 아니라 과학사에 있어서도 특별한 사건이었다.

    비록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두려움 없이 말했다. 러시아 혁명 직후의 억압된 환경이 계속되던 1922년 레닌에게 그의 연구소를 외국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레닌은 러시아에 파블로프와 같은 과학자들이 필요하며 파블로프도 영광스러운 공산주의자들과 같은 식량 배급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록 궁핍한 시기였지만, 파블로프는 이것을 거부하며 "당신이 나의 동료들에게도 같은 특혜를 주지 않는다면 나는 이러한 특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여 소련 관리들에 의해 부여된 많은 영광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1923년 미국을 최초로 방문(2번째 방문은 1929)한 후 그는 국제 마르크스주의는 실패했다고 언급했으며, "나는 당신들이 진행시키는 종류의 사회적 실험을 위해 개구리의 뒷다리를 희생시키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공공연히 공산주의를 비난했다.

    1924년 성직자의 자녀들이 레닌그라드의 군사의학 아카데미(임피리얼 의학 아카데미의 전신)에서 축출되었을 때, 파블로프는 "나도 성직자의 아들이다.

    만일 당신들이 나머지 사람들도 축출한다면 나도 떠날 것이다"라고 말하고 생리학 교수직을 사임했다. 1927년 과학 아카데미 내에서 새로 임명된 '적색교수'들에 대해 자신만이 유일하게 반대투표를 했다는 사실에 비탄하여, 그는 스탈린에게 편지로 "러시아 지식인들의 기를 꺾고 영혼을 말살하며 타락시키는 당신의 그러한 행동 때문에 나는 러시아인으로 불리는 것이 수치스럽다"라고 항의했다.

    그의 실험연구소는 N.I.부하린이 관리하는 정부 보조금을 지원받고 있었지만, 1920년대 후반 공산주의자에 대한 일종의 반대행동으로 그는 공산주의자 교육인민위원 부하린이 연구소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다.

    생애의 마지막 2년 동안 파블로프는 점차로 이러한 비난을 중단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공산정부가 조국을 통치하는 데 성공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러한 심경의 변화는 과학에 대한 정부 지원의 증가와 일본과의 전쟁이 임박한 데서 오는 그 자신의 애국심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파블로프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며, 그의 책임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세뇌기술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개인적인 습관에 있어서 파블로프는 시간관념이 철저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연구원들에게는 약속을 절대 어기지 말고 거리에서 혁명운동이 일어나도 연구소에는 제시간에 도착하라고 했다. 그는 과학과 개인적인 삶 모두에 있어 대담하고 맹렬한 반체제 인사였다. 그는 반대 압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맹렬하게 노력했다. 파블로프는 과학에 있어서는 불가지론을 고수했지만 종교를 유익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종교적 믿음에 헌신적인 자신의 부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부럽지 않다고 했다.

    파블로프에 대한 평가

    파블로프가 이룩한 과학에 대한 기여는 자연 조건에서 정상적이고 건강한 동물을 연구하는 그의 방법에 의해 가능했다.

    그는 복잡한 상황을 단순한 실험으로 환원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조건반사의 개념을 공식화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주관적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으며, 측정 가능한 생리학적 양으로 전환하지 않고는 정신적인 현상을 과학적으로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비록 파블로프의 업적이 행동의 과학적 분석에 기초를 제공했고, 과학자와 생리학자로서의 지위에 큰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은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탁월한 주관과 과학적 방법의 독자성을 인정했지만 과학 분야에서 주관과 과학적 방법을 분명히 분리하거나 이들을 개별적으로 정의하지는 않았다. 임상적으로 그는 정신분열증과 편집증에 관한 정신의학적 견해를 비판 없이 받아들였고, 유도와 계몽 같은 신경 개념이 고등한 정신활동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지금은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파블로프의 설명이 너무 제한적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어떤 신경생리학자들은 전기생리학과 생화학 같은 다른 분야의 발달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셰링턴에 비해 파블로프는 러시아 외부의 지지자들이 거의 없었으며, 정상적이고 건강한 동물을 마취 없이 연구하는 그의 방법은 일반적으로 생리학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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